[002] 세계경전 - 하나님에 관한 지식 - 2. 인간 자체에 내재한 하나님의 모습

 세계경전 Ⅱ

제1부 하나님과 창조

제1장 하나님

1) 하나님에 관한 지식

 

2. 인간 자체에 내재한 하나님의 모습

 

종교 경전

 

눈으로 볼 수 있는 이가 아니며, 언설로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이가 아니다. 감관으로도, 고행으로도, 혹은 거룩한 제사로도 그는 알려지지 않으며, 다만 마음이 지혜의 은총을 입어 청정하게 될 때, 명상 가운데 자기를 드러내 보이나니, 그는 부분 없는 일자이니라.

문디카 우파니사드 3.18(힌두교)

 

도라는 것은 있는 듯 없는 듯 황홀하기만 하다. 황홀하면서도 그 안에 형상이 있고, 그 속에 모든 것이 있다. 깊고 그윽하여 보이지 않지만, 그 속에 생명의 본질인 정령이 있고, 그 정령은 심히 진실하여 그 속에서 뻗어 나타난다. 예부터 오늘까지 여전히 도라고 부르며, 만물의 근원을 총체적으로 통솔한다. 우리가 무엇으로 만물의 근원의 실상을 알 수 있는가? 바로 도를 가지고 알 수 있다.

도덕경 21(도교)

 

오, 지혜의 주여! 나는 당신이

거룩한 분인 줄 알아보았습니다.

당신이 내게 선한 마음으로 나타났을 때

무언의 생각이 되어, 내게 지고선을 일어 주었고,

그래서 나는 그것을 널리 외쳤습니다.

아베스타, 야스나 45.15(조로아스터교)

 

실로 누가 이것을 아는가? 지금 누가 언명할 수 있을 것인가? 어느 길이 실로 신들에게 이르게 하는가? 최고의 천상에서 굽어보는 이, 다만 그 존재의 가장 낮은 측면들만 드러나 보이도다.

리그베다 3.54.5 (힌두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귀신의 성정과 공효는 위대한 것이다. 보려 해도 보이지 않으며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아니 하되, 만물의 본체가 되어 있어서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귀신은 온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목욕재계하고 옷을 단정히 하여 제사를 받들게 하고, 그들 위의 어느 곳에나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고, 그들의 좌우 어느 곳에나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시경에 ‘신의 강림하심은 사람으로서는 감지할 수 없는 것인데, 사람이 어찌 그것을 꺼리고 피할 수 있으랴!’ 라고 노래하였다. 그것은 사람으로서 잘 감지할 수 없는 귀신의 나타남을 말한 것이다.

중용 16(유교)

 

말씀 선집

 

‘하나님이 있다’ 하는 것은 말 뿐이 아닙니다. 원리를 통해서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중심삼고 볼 때 하나님은 불가피적으로 있어야 된다는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은 내가 있기 전에 있었으며, 내가 생각하기 전에 있었으며, 내 모든 감각, 나의 일체를 주관하는 하나님이라는 입장인 것입니다.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인식하고 하는 것이 원칙이 아닙니까? 알고 인식하는 것이 원칙이 아니라 인식하고 알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우면 추운 것을 느껴서 아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이 계시다면 신이 계신 것을 여러분이 느껴야 되겠습니다. 세포로 느껴야 되겠습니다. 그 경지가 문제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체휼적 입장을 어떻게 우리가 확정짓느냐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58-291~292, 1972.06.25)

 

하나님은 살아 있습니다. 악마도 살아 있습니다. 하나님과 악마가 살아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공산주의에서 말하는 관념과 실재가 철학에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전부다 관념입니다. 추상명사입니다. 양심도 관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랑도 관념입니다. 추상명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랑은 관념이 아닙니다. 실생활의 모든 면에서 접촉하고 있는 것입니다.

(186-67, 1989.01.29)

 

여러분은 사랑을 갖고 있습니까? 생명을 갖고 있습니까? 혈통과 양심도 갖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사랑을 본 적이 있습니까? 생명, 혈통, 양심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분명히 존재하는 것은 알지만, 이것들을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직 마음으로 느껴서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같은 논리로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할 때, 또는 하나님을 보았느냐 못 보았느냐 물을 때, 못 보았다는 말도 없다는 말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이 들어와 계시면 마음이 압니다.

(447-154~155, 2004.05.01)

 

자식을 낳아 보아야 부모님께 진정한 의미의 효도를 할 줄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스스로 실천해 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가는 길에 대한 가치를 느낄 수 있고, 하나님께서 같이 하신다는 것을 체휼할 수 있는 것입니다.

(29-198, 1970.02.28)

 

인류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물어볼 필요도 없습니다. 본심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인류가 타락하지 않고 본성의 선한 부모를 통해서 태어났던들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변론은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자연히 안다는 것입니다. 아기가 뱃속에서부터 젖 먹는 법을 배워 가지고 나옵니까? 나자마자 눈앞에 젖이 있으면 빨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동적으로 알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류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자동적으로 알고, 자동적으로 해결하고, 자동적으로 가야 할 입장인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전부 다 망각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를 논의하고 의심하는 결과의 세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참한 사실입니다.

(20-306~307, 1968.07.14)

 

양자를 중심삼고 전자가 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전자와 같은 우리 인간의 마음이 양자와 같은 하나님 마음의 핵심과 관계를 맺어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대하여 복귀섭리를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헤아려 볼 때, 우리가 혼자라도 진리의 말씀을 찾아나간다면 우리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약동하는 것을 느끼고 하나님의 사랑이 화동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진리의 길을 거쳐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찾아나가는 길이 가치 있는 내가 될 수 있는 길인 것입니다.

(2-137~138, 1957.03.17)

 

여러분이 심정으로 그리는 세계는 어떤 곳입니까? 그 세계는 외계의 감각을 통하여 들어오는, 오관을 통하여 들어오는, 인식 세계에서 빚어진 세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 정적인 세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 세계는 아주 작은 하나의 미립자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정의 세계입니다. 그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마 11: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통념적인 감성을 가지고는 주체적이요 원형적인 이념세계를 느낄 수 없습니다.

(7-255, 1959.09.20)

 

성약시대에는 본 전통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영계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이상의 본고향이 어디냐 하면 영계입니다. 영계를 모르면 하늘나라와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영계를 알아야만 하나님을 압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안다고 할 때, 하나님이 살고 계신, 활동할 수 있는 영계를 모르면 안 됩니다.

(365-302, 2002.01.14)



댓글